고코마쓰 천황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고코마쓰 천황은 남북조 시대의 일본 천황으로, 1382년 6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1412년 아들 쇼코 천황에게 양위할 때까지 재위했다. 그는 남북조의 화해를 이끌어 1392년 남조의 고카메야마 천황으로부터 삼종신기를 받아들여 남북조 시대를 종식시켰다. 이후 쇼코 천황과 고하나조노 천황의 치세에 걸쳐 원정(院政)을 실시했으며, 1431년 출가 후 1433년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고코마쓰 천황 - 고하나조노 천황
고하나조노 천황은 1428년에 즉위하여 30여 년간 재위하며 에이쿄의 난과 가키쓰의 난 등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었고, 치벌윤지를 발급하여 조정의 권위를 높였으며, 1464년에 양위 후 출가했다. - 고코마쓰 천황 - 쇼코 천황
쇼코 천황은 일본의 101대 천황으로, 고코마쓰 천황의 장남이지만 병약하고 기행을 자주 저질렀으며 후사가 없어 고하나조노 천황이 뒤를 이었다. - 15세기 일본의 군주 - 고쓰치미카도 천황
고쓰치미카도 천황은 일본의 제103대 천황으로, 오닌의 난 시기에 즉위하여 재정 고갈과 권위 실추를 겪었으나 쇠퇴한 조정의 의례를 부활시키려 노력했으며, 사후 장례조차 어려움을 겪었다. - 15세기 일본의 군주 - 고하나조노 천황
고하나조노 천황은 1428년에 즉위하여 30여 년간 재위하며 에이쿄의 난과 가키쓰의 난 등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었고, 치벌윤지를 발급하여 조정의 권위를 높였으며, 1464년에 양위 후 출가했다. - 1433년 사망 - 레러이
레러이는 후 레 왕조의 창업주이자 초대 황제로, 람선 봉기를 통해 명나라로부터 대월의 독립을 쟁취하고 국가 제도를 정비하며 자주적인 외교 정책을 펼쳐 베트남 민족의 독립과 국가 재건에 기여했다. - 1433년 사망 - 피카르다 부에리
피카르다 부에리는 피렌체 귀족 가문 출신으로 은행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와 결혼하여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코시모 데 메디치를 포함한 네 명의 아들을 낳았으며, 아들 코시모는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의 실질적인 통치 가문으로 만들었다.
고코마쓰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신상 정보 | |
휘 | 모토히토(幹仁) |
유칭 | (정보 없음) |
법명 | 소교치(素行智) |
출생 | 1377년 8월 1일 |
사망 | 1433년 12월 1일 |
릉묘 | 후카쿠사 북릉(深草北陵) |
가족 관계 | |
아버지 | 고엔유 천황 |
어머니 | 후지와라 노 겐시(三条厳子) |
배우자 | 히노니시 스케코 |
자녀 | 쇼코 천황 오가와노미야 리나가 여왕 잇큐 소준 (이설) 고하나조노 천황(양자) 그 외 (후비 및 황자녀 절 참조) |
양녀 | 히노니시 스케코 |
재위 정보 | |
북조 재위 기간 | 1382년 5월 24일 ~ 1392년 11월 19일 |
천황 재위 기간 | 1392년 11월 19일 ~ 1412년 10월 5일 |
연호 | 에이토쿠(永徳) 시토쿠(至徳) 가케이(嘉慶) 고오(康応) 메이토쿠(明徳) 오에이(応永) |
즉위례 | 1383년 1월 31일 |
대嘗祭 | 1383년 12월 10일 |
선대 | 북조: 고엔유 천황 , 남조: 고카메야마 천황 |
계승자 | 쇼코 천황 |
정치 정보 | |
정치 체제 | 무로마치 시대, 남북조 시대 |
수도 | 교토 |
황거 | 교토 고쇼 |
쇼군 | 아시카가 요시미쓰 아시카가 요시모치 |
간파쿠 | 니조 요시모토 (1388년) 니조 모로쓰구 (1388년–1394년) 이치조 쓰네쓰구 (1394년–1398년) 니조 모로쓰구 (1398년–1399년) 이치조 쓰네쓰구 (1399년–1408년) 고노에 다다쓰구 (1408년–1409년) 니조 미쓰모토 (1409년–1410년) 이치조 쓰네쓰구 (1410년–1418년) |
섭정 | 니조 요시모토 (1382년–1388년) 고노에 가네쓰구 (1388년) 니조 요시모토 (1388년) |
태정대신 | 니조 요시모토 (1381년-1387년) 도쿠다이지 사네토키 (1394년–1395년) 아시카가 요시미쓰 (1395년) 고가 도모미치 (1395년-1396년) 산조 사네후유 (1402년-1407년) |
기타 정보 | |
![]() | |
능묘 | |
위치 | 후카쿠사 북릉(深草北陵) |
2. 가계도
- 비(妃) : 光範門院일본어 히노니시(후지와라) 스케코(日野西(藤原) 資子, 1384년 ~ 1440년) - 히노니시 스케쿠니의 딸, 곤다이나곤 히노 스케노리의 양녀
:** 제2황자 : 사네히토 친왕(実仁 親王일본어) - (쇼코 천황)
:** 제3황자 : 오가와노미야(小川宮, 1404년 ~ 1425년)
:** 제1황녀 : 리에 여왕(理永 女王, 1406년 ~ 1447년) - 다이쇼지 몬제키
- 텐지 : 다이나곤텐지(大納言典侍) 칸로지(후지와라) 츠네코(甘露寺(藤原) 經子) - 칸로지 카네나가의 딸
- 궁인 : 후지와라(藤原氏) - 준대신 히노니시 스케쿠니의 딸
- 궁인 : 오요에노츠보네(小兵衛局) 미나모토씨(源氏) - 궁내 쇼스케 토키씨의 딸
:** 제2황녀 : ? (1412년 ~ ?)
- 궁인 : 비참의 시라카와 스케타다(白川 資忠)의 딸
- 궁인 : 후지와라씨(藤原氏)
:** 제1황자 : 잇큐 소쥰(一休宗純, 1394년 ~ 1481년) - 다이토쿠지 주지, 사생아라는 설도 있음
- 양자 : 히코히토 친왕(彦仁 親王) - (고하나조노 천황)
3. 생애
고코마쓰 천황은 남북조 시대라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히노 스케노리(日野資教)의 저택에서 자랐다. 1382년 아버지 고엔유 천황이 양위하자 6세의 어린 나이로 북조의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고엔유 천황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고엔유 천황이 상황으로서 섭정을 하자, 요시미쓰가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1392년, 아시카가 막부는 고카메야마 천황을 설득하여 삼종신기를 고코마쓰 천황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이는 고카메야마 천황이 고코마쓰 천황에게 일본 황실을 양보했음을 의미한다.[5] 당시의 평화 협정에 따라 남조와 북조가 번갈아 통치하기로 합의되었으나, 1412년 고코마쓰 천황이 이 합의를 어기고 아들 쇼코 천황에게 양위하면서 이 합의는 파기되었다. 이후 모든 천황은 북조에서 비롯되었다.
쇼코 천황은 병약하여 후사를 두지 못했고, 고코마쓰 천황의 둘째 아들마저 요절하면서 후계 문제가 발생했다. 고코마쓰 천황은 스코 천황의 혈통을 잇는 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지만, 쇼코 천황의 반발로 실패했다. 1428년 쇼코 천황이 사망하자, 사다후사 친왕의 아들이 고하나조노 천황으로 즉위했고, 고코마쓰 천황은 쇼코 천황 및 고하나조노 천황 2대에 걸쳐 상황으로서 섭정을 했다.
1433년 10월 20일 57세의 나이로 붕어(崩御)할 때까지 원정을 행하였으며, 고코마쓰 천황의 죽음으로 원정과 치텐노키미 제도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3. 1. 즉위 배경과 남북조 시대
고코마쓰 천황은 남북조 시대의 혼란기에 히노 스케노리(日野資教)의 집에서 자랐다. 아버지 고엔유 천황이 양위하여 6세에 천황으로 즉위했다. 당시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고엔유 천황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상황의 자격으로 섭정을 하던 고엔유 천황이 죽자 요시미쓰가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1392년 교토로 돌아온 남조의 고카메야마 천황에게서 삼종신기를 건네받아 대립하던 남북조 사이에 화의를 맺었다. 평화적인 통합의 일환으로 남조와 북조가 교대로 황위를 계승하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고코마쓰 천황은 1392년부터 일본 천황이 되었다.[4][6]
3. 2. 남북조 통일
1392년 교토로 귀환한 남조의 고카메야마 천황에게서 일본 황실의 상징인 삼종신기를 건네받아 대립을 거듭하던 남북조 사이에 화의를 맺었고 평화적인 통합의 일환으로 남조와 북조가 교대로 황위를 계승하기로 합의했다.[5][4][6] 이로써 고코마쓰 천황은 1392년부터 일본 천황이 되었다.1412년 고코마쓰 천황은 합의를 어기고 아들 미히토 친왕(훗날의 쇼코 천황)에게 양위하고 상황으로 물러났다. 쇼코 천황은 병약해서 후계자를 두지 못했고 차남마저 요절하자 대가 끊길 것을 우려한 고코마쓰 천황은 스코 천황의 혈통을 잇는 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에게 뒤를 잇게 하려 했지만 쇼코 천황의 반발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쇼코 천황이 젊은 나이로 죽자 사다후사 친왕의 아들이 고하나조노 천황으로 즉위했고 고코마쓰 천황은 쇼코 천황 및 고하나조노 천황의 2대에 걸쳐 상황으로서 섭정을 했다.
3. 3. 요시미쓰의 섭정과 상황 정치
1392년 교토로 귀환한 남조의 고카메야마 천황에게서 삼종신기를 건네받아 대립을 거듭하던 남북조 사이에 화의를 맺었고, 평화적인 통합의 일환으로 남조와 북조가 교대로 황위를 계승하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고코마쓰 천황은 1392년부터 일본 천황이 되었다.[5][4][6]1412년 고코마쓰 천황은 합의를 어기고 아들 미히토 친왕(훗날의 쇼코 천황)에게 양위하고 상황으로 물러났다. 쇼코 천황은 병약해서 후계자를 두지 못했고 차남마저 요절하자 대가 끊길 것을 우려한 고코마쓰 천황은 스코 천황의 혈통을 잇는 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에게 뒤를 잇게 하려 했지만 쇼코 천황의 반발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쇼코 천황이 젊은 나이로 죽자 사다후사 친왕의 아들이 고하나조노 천황으로 즉위했고, 고코마쓰 천황은 쇼코 천황 및 고하나조노 천황의 2대에 걸쳐 상황으로서 섭정을 했다.
명덕 3년(1392년) 윤10월 5일 명덕의 화약에 의해 남조의 고카메야마 천황으로부터 삼종신기를 양도받는 형태로 남북조 합일이 이루어졌다. 명덕 4년(1393년)에 후엔유 상황이 붕어(崩御)하자,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더욱 조정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여 상황의 권세를 계승하고, 후세에 “요시미쓰의 원정”(義満の院政)이라고 불리는 권력을 휘둘렀다.
오에이 19년(1412년) 8월 29일, 고코마쓰는 황자 미히토 친왕(칭광 천황)에게 양위(譲位)하고 원정(院政)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명덕 3년(1392년)의 남북조 합일 당시의 조건인 양통협립(両統迭立)에 위배되었고, 그 후 남조 세력은 여러 차례 반발하여 무장 봉기하였다.
지텐노군으로서의 고코마쓰의 입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사사키 무네오는 고코마쓰를 지텐노군으로 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아시카가 요시미쓰에 의한 고코마쓰의 후견이라는 형태로의 치텐 권한 대행 기간을 거쳐 재개된 고코마쓰의 치텐에는, 과거의 전주(伝奏)를 중심으로 한 정중(庭中)(문전(文殿)・기록소(記録所))・잡소사타(雑訴沙汰)(잡소평정)・원평정(院評定)(의정) 등은 기능하고 있지 않고, 전주를 매개로 무로마치 덴(室町殿)(아시카가 요시모토)와 밀착하여 정무를 행하는 체제는 지금까지의 지텐노군과는 명백히 이질적인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11]
칭광 천황은 병약하여 여러 차례 위독한 상태에 빠졌고, 황자의 탄생도 없었으며, 또한 고코마쓰의 둘째 황자 오가와궁(小川宮)도 요절하였기 때문에 후계자 문제가 발생하여, 고코마쓰 상황은 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토와 협의하여, 후계자로서 숭광류의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리 친왕이 유력시되었고, 한때 고코마쓰의 유자(猶子)로서 친왕선하(親王宣下)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칭광이 격렬하게 반발하였기 때문에, 사다나는 출가(出家)하여 황위 계승을 단념하였다.
조초 원년(1428년), 칭광이 위독해지자,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중재도 있어, 그 사후에 사다나리의 아들 히코히토를 유자(猶子)로 삼아 고하나조노 천황으로서 즉위(即位)시켰다.[12]
칭광・후가에나 2대에 걸쳐 원정(院政)을 행하였고, 이 기간 중 에이쿄 3년(1431년)에 출가(出家)하였다.
3. 4. 말년
1412년 고코마쓰 천황은 남북조 합일 당시의 조건인 양통협립(両統迭立)에 위배되게 아들 미히토 친왕(훗날의 쇼코 천황)에게 양위하고 상황으로 물러났다. 쇼코 천황은 병약하여 여러 차례 위독한 상태에 빠졌고, 황자를 얻지 못했으며, 고코마쓰 천황의 둘째 황자 오가와 궁도 요절하여 후계자 문제가 발생하였다. 고코마쓰 상황은 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와 협의하여 스코 천황의 혈통을 잇는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리 친왕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쇼코 천황의 반발로 사다나리는 출가하여 황위 계승을 단념하였다.정장 원년 쇼코 천황이 위독해지자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중재로 사다나리 친왕의 아들 히코히토 친왕을 유자(猶子)로 삼아 고하나조노 천황으로 즉위시켰다. 고코마쓰 천황은 쇼코 천황 및 고하나조노 천황의 2대에 걸쳐 원정을 행하였고, 영향 3년에 출가하였다. 그러나 고코마쓰 천황이 영향 원년 10월 출가 의사를 밝혔으나 요시노리에게 사전에 알리지 않아 요시노리의 반발로 연기된 바 있다. 이때 요시노리의 반감은 사다나리 친왕과의 관계 강화로 이어져, 훗날 고코마쓰 천황의 유지를 거스르는 사다나리 친왕에게 태상천황 칭호를 주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견해가 있다.[13]
영향 5년 10월 20일에 57세로 붕어(崩御)하였다. 고코마쓰 천황의 붕어로 원정과 치텐노키미 제도는 사실상 종언을 맞이했다. 이후에도 에도 시대의 고카쿠 상황까지 원정은 여러 차례 행해졌지만, 형식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4. 연호
시대 | 연호 | 비고 |
---|---|---|
남북조 시대 북조 | 메이지 천황의 칙령에 따라 정통으로 인정된 조정의 연호 | |
남북조 시대 남조 | 메이지 천황의 칙령에 따라 섭정으로 인정된 조정의 연호 | |
남북조 이후 조정 | 고카메야마 천황의 퇴위로 명덕 3년이 겐추 9년을 대체하면서 연호가 통합됨. |
5. 남조 경쟁자
- 조계
- 고가메야마
참조
[1]
웹사이트
後小松天皇 (100)
http://www.kunaicho.[...]
2013-08-28
[2]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https://books.google[...]
1834
[3]
서적
Gukanshō
https://books.google[...]
1979
[4]
서적
(Titsingh reference)
[5]
서적
The Mikado's Empire: book 1. History of Japan from 660 B.C. to 1872 A.D.
https://books.google[...]
1913
[6]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https://archive.org/[...]
Stanford University Press
1961
[7]
서적
The Imperial House of Japan
1959
[8]
서적
尊皇攘夷―水戸学の四百年
2021
[9]
서적
看聞日記
1973
[10]
서적
中世の国家と天皇・儀礼
校倉書房
2012
[11]
서적
日本中世国制史論
吉川弘文館
2018
[12]
백과사전
後花園天皇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
[13]
서적
足利義教と北朝天皇家
勉誠出版
2015
[14]
웹사이트
https://biz-journal.jp/journalism/post_27062.html
https://biz-journal.[...]
サイゾー
2019-03-2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